장순하 동문 (국어국문학과 58년 졸업/마카오 슬롯 머신 하는 법인)[투철한 실험정신으로 전통시조의 형식을 탈피해 새로움을 꾸준히 추구함으로써 현대시조의 형식과 내용면에 새 영역을 개척해왔다고 평가받고 있는 사봉 장순하 선생(국어국문학과 58년 졸업). 시조인으로는 최초로 지난 4월에 문학전집을 발간하고 5월,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출판기념회 직후 '장순하문학관 건립 추진위원회'가 결성돼 문학관 건립을 위한 움직임이 일고 있다. 우리 민족의 문화와 정신이 깃든 겨레시인 시조 보급을 위해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최고의 시조시인 장순하 선생을 직접 만나봤다.]

6.25전쟁과 익산, 그 운명적 만남
사설시조와 경시조의 대가로 불리는 백발의 장순하 시인이 마음의 고향 익산에 내려왔다. 참 오랜만의 일이다. 세종중등국어교사양성소를 졸업한 그는 이틀 뒤인 1950년 6월 26일, 당시 남성중학교에서 들어온 교사제의를 거절하러 이리(지금의 익산)로 내려오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서울에서 내려오는 마지막 기차였다. 6.25전쟁이 발발한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렇게 익산과의 인연은 시작됐다. 그는 익산과 자신은 '운명'이라고 말했다. 그 후로 그는 익산 남성중ㆍ고등학교에서 16년 동안 교사생활을 했다. 교사생활을 하던 중 우리마카오 슬롯 머신 하는 법 국문과에 편입했고 1958년에 졸업했다.

문학에 빠진 소년의 화려한 등단
소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일본문학전집과 일역본 세계문학전집을 독파했다. 그 당시는 일제강점기였기 때문에 한국어로 된 문학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있다하더라도 어린 소년은 찾아 볼 수 없었다. 그저 일본어로 된 문학책을 읽고 또 읽을 뿐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글을 읽고 쓰는 것만이 평생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해방이 되자 지금까지 그가 읽었던 문학들은 다 "헛것"이 됐다. 모두 일본어였기 때문에.

이제야 새삼스레 진짜 우리말인 "한글"을 배워야했는데, 배울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서울로 향했다. 한글학회 주최의 한글강습반에서 공부했다. 당시 전국에서 한글을 가르치는 유일한 곳이었다. 공부를 하던 중 중등교원양성소에 입학해 국어교사가 됐다.

이때 자연스레 한글로 된 시와 소설을 접했고 습작을 거듭하다가 우리마카오 슬롯 머신 하는 법에 재학 중이던 1957년, 이승만 대통령의 직접적인 지시로 이뤄진 제1회 개천절 경축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면서 화려하게 등단했다.

가람 이병기와의 운명적 조우
한글학회에서 한글을 공부하던 시절, 그는 은사들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당시 그에게 배움을 줬던 은사들은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됐다가 해방 후 풀려난 한글학자가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어렵게 한글을 지켜낸 학자들이기에 누구보다 더 열정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쳤고 그 안에서 선생의 창작열은 영글어 갔다.

조선어학회사건은 일제가 1940년대 조선인 민족말살 정책에 따라 식민지 통치를 보다 강화하기 위해, 민족의식을 고양시켰다는 죄목으로 한글연구를 한 학자들을 탄압하고 투옥한 사건이다. 대표적인 인물은 최현배, 이희승 선생 등인데 이들은 모두 그의 은사다. 이 덕분에 그는 한글을 배우면서 민족의식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또 거기서 그는 가람 이병기 선생을 운명적으로 만났다. 이병기 선생에게서 우리 문학작품의 아름다움과 우리 민족문화가 세계적으로 우수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본래 소설에 관심이 많았지만 한글의 아름다움을 표출하기엔 시가 적격이라 생각했고 더 나아가 민족의 얼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민족시, 바로 시조라 생각했다. 그래서 팔순이 넘어 백발이 된 지금까지 장장 60년이 넘는 세월을 시조를 쓰고 있는 것이다. 가람선생의 가르침을 받들어 우리 민족문화와 정신을 지키는 것이 자신이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지난 6월 17일 익산에서 '가람선생과 현대시조'라는 주제로 강연회를 열었다. 마음의 고향 익산에서, 정신적 지주인 가람선생의 뜻을 잇는 강연이라 더욱 뜻 깊게 다가왔다.

전집출간 – 전8권 원고지 5.2m의 대작
지난 5월에는 그가 평생 염원하던 '장순하 문학전집'이 출간됐다. 시조시인으로는 최초다. 시조집, 경시조집, 평론집, 수필집, 장순하론 등 총 8권으로 이뤄진 전집에서 시조시인으로서 평생을 살아온 그의 숨결을 모두 느낄 수 있다. 그가 평생 동안 쓴 수많은 작품 중에서 전집으로 간행되어져 나온, 총 8권 6,000여 쪽의 분량은 원고지로 쌓아 놓는다면 그 높이가 5.2m에 이르는 방대한 양이다.

그는 시조창작에만 그치지 않고 시조 평론, 시조 보급 운동에 이르기까지 시조와 관련된 폭넓은 활동을 해왔다. 그는 "우리의 민족시인 시조를 많은 사람들이 지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조는 형식이 있으니까 그 형식에 사람들의 여러 생각을 맞추면 어느 것이든 근사한 시조가 된다. 이를 통해 시조의 저변을 확대하고 그중에서 좋은 작품이 나오면 시조가 더욱 융성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끝없는 시조사랑
그는 경수필에 쓰는 "경"자를 시조에도 적용해 '경시조'라는 새로운 이름과 장르를 만들었다. 누구든지 떠오르는 생각을 경쾌하고 가볍게 시조로 쓸 수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기자와 인터뷰 도중 선생은 즉석에서 경시조를 선보였다. 익산과의 운명적인 만남과 오랜만에 익산을 찾은 느낌을 표현한 "다시 익산에 와서".

한글의 아름다움과 우리 민족문화, 정신을 지키기 위해 시조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사봉 장순하 선생. 민족의 겨레시인 시조 보급을 위해 여생을 바치겠다는 형형한 그의 눈빛에서 민족문화 사랑의 올곧은 정신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 민족시의 역사를 잇고 있는 그 덕분에 시조가 우리나라를 넘어서 세계시로서 굳건한 자리매김을 하리란 확신이 든다.
2010년 08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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